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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삶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려는 초격차 미술작가 최해덕(崔海德)

초야에 묻혀 명화를 구상하며 위대한 예술의 길을 가고 있는 『은둔의 작가』

전봉진 대기자(topgolf1@daum.net) | 기사입력 2024/03/05 [19:15]

그림으로 삶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려는 초격차 미술작가 최해덕(崔海德)

초야에 묻혀 명화를 구상하며 위대한 예술의 길을 가고 있는 『은둔의 작가』

전봉진 대기자 | 입력 : 2024/03/05 [19:15]

 

『무풍천지무화개(無風天地無花開)』, 『무로천지무결실(無露天地無結實)』. 바람이 없는 곳에는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없고, 이슬이 내리지 않는 곳엔 탐스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함의다. 또한 『고난은 행복으로 가는 길목』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한편, 세계적인 문호 『괴테(Goethe)』는 “인류 지성과 문화가 진보한다 해도 기독교 복음과 정신, 윤리의 고귀함 이상으로 인간 정신이 진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들은 한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며 『기독교 정신』에 바탕한 구도자(求道者)처럼 오롯이 그림에만 천착(穿鑿)하는 삶을 일구어온 참빛아뜰리에 『최해덕 작가』의 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 대사역의 장엄하고 눈물겨운 기적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 믿은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라며 오늘도 말없이 붓끝을 가다듬는 그를 만나기 위해 고양시 도내동 화실 겸 가정집으로 찾아갔더니 뜻밖에도 아름다운 전원풍경과 예쁜 애완묘(愛玩猫) 두 마리가 하얀 털을 부벼대며 반겨준다. 장장 1시간 넘게 열정과 감동, 때론 울컥하는 격정이 뒤엉킨 생생한 얘기들이 오갔다. 부창부수(夫唱婦隨)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고 헤쳐나가는 최 작가와 그의 평생의 동반자 강명자 여사야말로 대한민국의 소중한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탑골프는 최해덕 작가에게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초격차 화가(畫家)』라는 특별한 닉네임을 드리고자 한다. 그들의 심오한 그림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지난 삶의 궤적들을 쭉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할 것 같다. 세찬 바람이 불었건, 차디찬 새벽이슬이 내렸건 간에.

 

귀가 닳도록 들었던 그 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자리에 앉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어떻게 미술하고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타고났다고 봐야죠~’라고 답한다.

“제가 을지로 4가에서 태어났는데, 6.25 전쟁이 터지자 온 식구가 할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피난을 갔습니다. 당시 제가 칠성국민학교를 다녔는데, 6학년 여름방학 때 그림을 그려오라는 숙제가 있었어요. 저는 경주 불국사를 수채화로 그려서 냈더니, 선생님이 ‘이 자식! 어디서 누구한테 그려가지고 와서는 내미느냐’며 꽤 딱딱한 몽둥이로 때리는데 정신이 없더라고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제가 그린 게 맞다고 막 대들었어요. 그럼 보는 앞에서 직접 테스트를 하자고 해서 보여줬더니 말을 못하며 내일 아침 조회 때 보자고 하더라고요. 당시는 매일 아침 조회가 있었는데, 호명하기에 나갔더니 교장선생님이 표창장을 주셨습니다(웃음).”

어린 나이에 비해 최 작가가 꽤나 당차고 그림 소질도 있었던 아이였던 거 같다.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처럼 큰 인물 뒤에는 존경스런 집안 어르신의 가르침이 늘 자리매김한다. 고난에 부닥쳐도 ‘신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며 능히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는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나의 성공은 오롯이 어머니의 덕(德)”이라고 하였다. “저는 독립운동 하신다고 평생을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집안에서 제가 존경하는 분이었어요. 그분은 철부지 같은 제게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셨어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 말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소금나물죽 단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웠던 처절했던 시절

그림에 대한 갈망이 커서 영화배우들 얼굴 사진을 보고 데생을 한답시고 연필로 끄적거리던 중학교 2학년 나이쯤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길밖에 나앉을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부득이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금호동 달동네에 흙벽돌을 찍어 집을 마련하고 버텼어요. 처절했던 보릿고개 시절이었지요. 제 기억으로 당시 쌀은커녕 보리쌀로도 끼니를 때워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최 작가가 갑자기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인터뷰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도 우리랑 같이 사셨어요. 할머니는 한강변 뚝섬에 나가 나물을 뜯어다가 가마솥에 넣고 비지와 소금을 적당히 버무려서 죽이랍시고 끓이셨어요. 그거 한그릇 먹으면 그걸로 하루 끼니는 끝이었어요. 그래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은 앞섰지만 호롱불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한번은 소방관이던 숙부 집에 놀러갔더니, 신탄진 담배를 혼자 죽죽 피고 있더라고요. 하도 열받아서 ‘작은 아버지! 지금 그 신탄진 담배 연기가 목구멍에 넘어갑니까? 할아버지는 꽁초를 주워다가 신문지에 말아서 피고 계시는데 말입니다.’하고 따졌지요. 당시 중학교 다닐 형편도 못되었을 만큼 찌들리게 가난했어요. 작은아버지는 어이가 없었는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고는 휙 나가버렸어요. 그때 ‘아~ 집안 꼴이 개판이구나. 벌어도 내가 나서서 벌어야겠다고 속으로 되씹고 또 되씹었어요.” 

 

▲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

▲ 십자가

 

철공소 사장님의 뜬금없는 『야~ 너 나랑 내기 안 할래?』

최 작가로부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줄줄 나오는 한 맺힌 청소년 시절의 얘기를 듣다 보니 가슴이 멍해진다. 더 들어보았다. “인생의 승패는 삶의 여정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는데, 마침 누구 소개로 을지로 3가에 있던 을지극장에 극장 간판 그리는 거 보조하며 배우는 허드렛일꾼으로 들어갔어요. 후에 파라마운트극장으로 바뀐 후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저같이 배우는 친구들이 6명 정도는 됐어요. 여기서 저 그림 그리는 것을 빨리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요. 당시만 해도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이 꽤 쏠쏠했어요. 하지만, 이 바닥의 선배들이 몹시 엄격하고 군기가 셌어요. 그분들 죄다 퇴근하고 나면 저 혼자 남아서 자그마한 파레트를 하나 만들고 겉에다 천을 씌워 잘 안 보이는 구석에 감춰두고 꺼내 써야 했어요. 그때는 옥수동에 살았는데,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새벽에 집 건너편 교회 종소리가 나면 일어나서 할머니가 저녁에 쒀놓으신 비지소금죽 한 그릇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집을 나서서 걸었어요. 출입문이 닫혀 있는 이른 시간이라 부득불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서는 파레트를 꺼내 놓고 도둑놈마냥 그림 그리는 공부를 남몰래 했어요. 자칫 고참들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죽도록 얻어맞았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일을 배웠는데, 한번은 어떤 일이 벌어졌냐 하면~” 하며 울컥하더니 또다시 말을 잇지 못한다.

“당시 을지로 3가쯤에 『송옥』이라는 짜장면집이 있었어요. 짜장면 한 그릇에 20원인가 할 때였는데 양이 꽤 많았어요. 돈이 없어 걸어 다니는 형편에 도시락은 언감생심이었지요. 점심시간에 다들 도시락 꺼내 놓고 먹을 때면 저혼자 슬그머니 ‘밖에서 먹고 오겠다.’며 나와서는 남의 담 밑에 매일 쭈그리고 (또 울컥하며 목이 메어 말이 끊긴다) 앉아있다가 들어가곤 했어요. 일터 옆에 철공소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사장이 왔다 갔다 하다가 저를 본 거예요. ‘야~너 나하고 내기하자. 네가 저 짜장면 6그릇을 다 먹으면 내가 사고, 아니면 네가 사는 거다.’ 이게 웬 떡이냐며 수락을 했어요. 정말로 짜장면 6그릇을 한꺼번에 시키더라고요. 첫 젓가락을 뜨려는데 손이 파르르 떨려서 도저히 진정이 안 되더라고요. 그때 퍼뜩 ‘저 짜장까지 한꺼번에 비벼서 먹으면 도저히 다 못 먹을 테니 면만 우선 먹고 짜장은 마지막에 마셔야지’하고 머리를 굴렸어요(웃음). 은근히 겁도 집어먹었지요. 주인에게 빈그릇을 하나 달라고 해서 짜장을 다 덜어놓고 면만 3그릇까지는 맛있게 먹었어요. 하지만, 6그릇째 먹으려는데, 왠지 목까지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식탁을 짚고 일어나서,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살금 살금 화장실로 가서 손가락으로 혓바닥을 살짝 건드리니까 ‘와락’ 다 쏟아 지더라고요. 밖으로 나오니까 그 사장님이 200원하고 활명수 하나를 들고 서는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참 고마우신 분으로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을지로 허드렛일꾼이 『영화간판 그림의 대가(大家)』로 도약

극장 간판 그리던 사람들은 죄다 저보다는 6~7년 위의 고참들이었어요. 들어간 지 1년 남짓할 즈음이예요. 당시 액션배우 황해, 이향 주연의 『안개낀 거리』라는 소위 주먹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는데, 마네킹 간판을 쳐다보니까 저 혼자 그려도 이제는 어느 정도는 그릴 수 있겠는데 하는 자신감이 들더라고요. ‘에이~ 들켜서 얻어맞으면 맞는 거고 이판사판 한번 해보자’ 하고 배짱 좋게 담을 뛰어넘어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어~ 이 자식 봐라! 언제 이걸 다 그렸지. 제법인데. 계속 해봐. 괜찮아.’ 그다음 날부터는 저보고 도맡아서 그리라는 거예요. 졸지에 고참 한 명을 제 밑에 조수로 두게 되었어요. 저보다 6년 먼저 들어왔는데, 이제는 제 파레트와 붓을 빨아야 하는 처지로 뒤집힌 거지요(웃음). 철저한 실력과 기술 본위의 사회였으니까요. 그때는 극장에 취직하면 신분증이 다 나와서 주위의 명보극장 등 일류극장 어디에나 무료로 돌아다닐 수 있는 특권을 줬어요. 하지만 저는 신분증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찢어버렸어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영화 보러 다닐 때에 저는 그 시간마저 아깝더라고요. 한마디로 독하게 공부하며 우리나라에서 극장 간판 그림을 가장 빨리 배운 사람이 된 겁니다(웃음). 저는 뭐든 한번 마음을 먹으면 끝장을 보는 성미입니다.”

 

 

논어에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이 있다. 공자께서 제자에게 말씀 하셨다.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은 것을 배워 아는 줄 아느냐(多學而識之 者). 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다. 나는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안다. 일이 관지란 흩어져 있는 것을 하나로 꿰어 파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어쩌면 최해덕 작가야말로 적어도 그림에 있어서는 공자처럼 일이관지(一以貫之) 의 능력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 물은 생명의 원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귀신잡는 해병으로 베트남에 가다

점차 자신감이 붙고 몸값도 뛰며 국도극장으로 스카웃까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작은아버지하고 한판 크게 대거리를 하고 난 뒤부터는 ‘야~ 이런 세상 살아서 무엇하냐’는 회의감이 강하게 들었다고. 그 무렵 징집영장이 나오자 베트남에 가서 전투나 실컷하다가 죽는게 낫겠다며 해병대를 지원했다고 한다. 당시 해병 청룡부대는 베트남에 파병갈 수 있는 최우선 순위였다.

 

“저는 죽겠다고 마음먹으니까 도무지 겁이 없는 거예요. 수색 정찰을 나갔는데, 베트콩 스나이퍼가 ‘핑’하고 총을 쏘면 다들 고개 숙이고 납작 엎드리는데, 저 혼자는 뛰어 들어갔어요. 그러다가 뒤에서 쏘는 아군 총에 맞아 죽을뻔한 적도 많았어요. 저는 베트콩도 여러 명 사살과 생포도 하여 표창도 많이 받았어요. 한번은 아군이 설치한 부비트랩이 터지는 바람에 파편이 아직 다리 여기저기에 박혀 있어요. 국가유공자 혜택도 안 받았는데, 얼마 전에 심장에 스텐트 박으니까 고엽제하고 묶어서 연금이 나오더라고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체질화되었는지 세속적인 면에 너무 무관심하다고 할까요. 저보고 친구들은 바보라고 불러요(웃음). 제가 혁혁한 전과(戰果)를 세우는 걸 보고 무턱대고 뛰어들다가 죽은 전우들도 적지 않아요.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 위에 계신 분께서 제게 강한 믿음을 주신 거 같아요. 부상을 당해도 야전병원에서 알콜로 간단히 상처만 소독하고는 자대로 복귀했어요. 후에 주월한국군사령부(채명신 사령관) 쪽에서 전쟁기념관 만든다고 저를 차출하더라고요. 청룡, 맹호, 백마, 비둘기 부대에서 그림과 차트 글씨 깨나 가장 잘한다는 사람들만 뽑혀왔어요. 그림은 단연 제가 발군이었어요. 귀국 후에는 당시 울진·삼척 두리봉 무장공비 토벌대로 포항 해병 부대에서 작전에 투입되었어요. 눈에 뵈는 게 없던 저는 베트남은 물론 공비 토벌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었다고 할까요(웃음).” 

 

▲ 생명의 근원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를 『나의 주 하나님』으로 영접하다

잘 나갈 때가 진정한 위기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삼성 이건희 선대회장은 강조했다. 최 작가도 예외가 아니다. 잘 나가다가 사기를 당하고 한방에 빈털터리가 돼버린 것. “제대하고 미국에 그림 수출하는 회사에 들어가서 돈을 엄청 벌었어요, 저는 그림 그리는 속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2배 이상 빨라요. 마이애미, 뉴욕, 시카고 등 그 지역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상이 뭔지를 빨리 캐치하고 가구도 앤틱으로, 개도 성조기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있는 거를 그려주면 무척 좋아하지요. 우리나라는 태극기 훼손한다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러다가 미국 교포에게 사기 당해서 집까지 날리고 빚까지 떠안게 되었습니다. 아들 둘은 부모님한테 맡겨 놓고, 안양의 산본 쪽으로 가서 개와 돼지를 키웠는데 사업이 잘되며 꽤 회복할 수 있었어요. 한동네서 같은 일 하는 부부 6쌍이 교회버스를 빌려 도고온천을 거쳐 해변가로 가서 술도 잔뜩 마시며 잘 놀다가 눈이 엄청 오는1984년 3월 1일 상경하게 되었어요. 일행 중 운전을 조금 터프하게 하던 분이 앞차들이 엄청 밀리니까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며 올라간 거예요. 당시 조수석에 앉았던 제 눈에 반대편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버스가 보였어요. 순간 저는 정신을 잃고 기절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났어요. 사고 당시의 엄청난 충격으로 제 왼쪽 다리가 골반을 치고 들어가며 골반뼈가 7~8조각으로 산산이 으스러졌어요. 운전자와 바로 뒷좌석의 여자분은 즉사하였고, 저도 뉴스에 사망자로 떴다고 하더군요. 병원은 머리털 나고 처음인지라, 눈 뜨자마자 ‘내가 왜 여기 누워있지’ 하며 링거 줄을 다 뽑아버렸더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난리가 난겁니다. 소변을 보는데 엄청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저를 의사가 사망자로 판정하자 어차피 다 죽은 사람이라며 소변을 빼낸다고 제 요도에다 못쓰는 링거 줄을 잘라서 끼워놓은 거지요. 집사람은 안양 중앙병원으로 갔다고 해서 당장 그쪽으로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니까 다들 황당해 했어요. 의사가 제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해서 철석같이 믿고 2개월 반 동안 대소변 다 받아내며 참았는데 알고 보니 엉터리 수술이었어요. 아~ 이제 나는 끝이구나. 의사가 나를 속였구나. 당시 제 나이가 38살이었어요. 목발을 짚고 의사방으로 들어가서 ‘야 이 자식아~ 낫는다고 했잖아’ 하면서 목발로 내리치니까 의사가 책상 밑으로 후다닥 도망치더라고요. 원장부터 환자들까지 다 몰려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책임자가 와서 뭐 때문에 그러냐고 해서 다른 병원으로 갈 거라고 했는데, 성남에 있는 서울대 출신 오정일 의사가 우리나라에서 최고 권위자라고 하더라고요. 오 박사가 X-레이를 찍어보더니 ‘의사가 의사를 고소하지는 못하니까 각서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분 덕에 우여곡절 끝에 퇴원했지만, 이처럼 왼쪽 발을 저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제 집사람도 그날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다 온 거나 마찬가집니다. 운전석 뒷자리에 원래 집사람이 앉았는데, 사망한 여자분이 자리를 바꾸자고 해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어요. 기적이라고 하는 말 외에는 뭐라 할 말이 없어요.”

 

▲ 심장(선과악)

 

▲ 합창

 

『오산리 기도원』에서의 기적 같은 체험으로 환골탈태하다

그후 달라진 삶의 변화가 궁금하다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나온다.

“교통사고 후 천호동으로 이사 와서 조그만 가게를 하나 꾸며서 그림도 그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누워있는데, 귀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거예요. 벌레인지 하루살이 같은 게 들어가서 쑤시고 긁는데, 신경이 곤두서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서울대병원에 2번이나 갔는데도 의사들도 귀수술 하다가 자칫하면 정신장애가 올 수 있다고 겁을 주는 겁니다. 그때부터 괴로워서 술만 마시는데,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를 않고 맹물인 거예요. 몸이 점점 불어나길래 금식기도 가서 수십 일씩 굶으면 되겠지 해서 알아봤더니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하는 오산리 기도원을 추천하길래 이 귓병만 고친다면 뭔들 못하겠냐며 매달렸어요. 하나님께 참회기도를 하던 3일째 되는날 저에게 이상하게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겁니다. 베트남에서 시체 썩는 냄새 많이 맡아봤거든요. 아~ 여기 병 고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지요. 그때 커다란 대형 스크린 속에서 제가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어릴 때 대구에서 수영한다고 물에 휩쓸려 죽을 뻔한 모습, 무태강에서 스케이트 타다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누군가 줄을 던져줘서 겨우 살았던 모습. 베트남에서 적군들 쏴죽인 거와 파편 맞는 거 그리고 3. 1절 교통사고 난 것까지 파노라마처럼 좍 지나가는 거예요. 교회 버스가 온통 다 찌그러진 게 생생하게 보이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제가 대성통곡(大聲痛哭)이 나오는 거예요. 6일째 되던 날에는 기도를 한다고 '하나님 감사합니다'고 운을 떼는데, 갑자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거예요. 예전에 집사람이 상일동 쪽에 불광사라는 절에 간 적이 있는데,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니까 비구니스님이 탱화를 그려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딴에는 다른 곳하고는 차별화 한다고 입체적으로 그려서 절에 걸어주고 왔는데, 밤 12시 땡 치자마자 허리가 아파서 별곳을 다 다녀도 안 낫는 통에 무지 고생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기도원에서 퍼뜩 그때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아~ 맞아.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모르고 그랬으니 용서해 주세요'하고 참회기도를 했더니 씻은 듯이 통증이 가라앉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엄청난 달란트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성화를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파송(派送)

 

우리나라 최초로 『클린턴 대통령 취임 기념 초상화』로 백악관에 진출

예전에 그가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안에 있는 남포교회를 다녔는데, 거기서 오퍼상하는 어느 장로분을 만났다고 한다. “어느날 클린턴 대통령 초상화를 그려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미국에 제일 큰 골프장을 가지고 있는 바이어가 대통령 취임 기념으로 특별히 부탁하는 거니까 잘 좀 그려달라고 하더라고요. 50호짜리에요. 제가 저 얼굴 하나 그림으로 그리려고 그러느냐, 사진 찍어서 붙여 놓아도 잘 나오는데... 그림 속에는 사진과 달리 깊은 의미가 곁들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얘기하고, 이분이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했더니 John F. Kennedy 사진을 보내왔더라고요. 결국 자유의 여신상까지 넣어서 그려보냈더니, ‘아~좋다’고 메시지가 온 겁니다. 그림 원판 위에 필름을 대고 Bill Clinton이라는 친필사인까지 했더라고요. 이 그림이 채택되면 미국 민주당 전체 지구당 사무실에 하나씩 걸릴 수 있다고 했는데, 최종적으로 컨테이너두 박스 정도가 나간 덕분에 수억원의 외화를 획득한 애국자가 되었다고 할까요(웃음).”

 

▲ 빌 클린턴 대통령 초상화

▲ 오드리 헵번 초상화

 

사랑하는 아내 『강명자 여사』에게 진 평생의 빚

베이컨이 말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란 초년에는 여주인공이고, 중년에는 친구고, 노년에는 유모다.” 그렇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이 1시간여 흘렀기에 슬슬 가족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평생의 벗 『강명자 여사』와는 어떻게 만나셨는지 귀띔해 달라고 하였다.

“요즘 집사람이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어서 일주일에 2~3번은 병원에 태워다 주고 뒷바라지를 합니다. 삼풍이라는 그림 수출회사에 있을 때, 한동네 살다 보니 출퇴근 버스 안에서 가끔 만났어요. 첫눈에 키도 훤칠한 미인이라서 ‘이 사람이 다’ 싶어 죽기 살기로 쫓아다녔어요. 어느날 퇴근 버스에서 내리길래 얘기를 좀 하자고 했더니, 이리저리 따돌리고 피했어요. 할 수 없어 집 앞까지 따라갔더니 후일 만나자고 약속날짜를 주더라고요. 을지로 계림극장 옆커피샵에서 만나 이런 얘기 저런 얘기도 하고, 제 화실에 와서 제가 그림 그리는 모습도 지켜보면서, 저의 진정성을 받아준 거 같아서 천하를 얻은 듯 기뻤습니다. 저는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오직 집사람만 바라 보고 평생을 함께 가고 있습니다(웃음).”

 

한편, 그의 아들은 고용노동부 고위공무원인데,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커서 지난 2월 15일에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며,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한다. 옛말에 덕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따른다는 뜻의 『적덕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 必有餘慶)』이자, 오롯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일한 최 작가처럼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니겠는가.

 

▲ 기상

에필로그 :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昌大)하리라

『최해덕 작가』는 추상(秋霜)같은 올곧음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예술가다. 한편의 드라마처럼 굴곡(屈曲)진 삶의 기나긴 얘기들을 아쉬움으로 매듭지으며, 인생의 좌우명과 이 세상을 향해 토로(吐露)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잠깐 상념에 잠기더니 지금 심혈을 기울여 붓을 터치하고 있는 『길』이라는 100호 짜리 캔버스를 가리킨다. “저는 『올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자』를 삶의 철학으로 살아 오며 붓과 함께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속에 어두워 집사람을 고생시킨 거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 최해덕은 앞으로 그림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의 의미와 구체적으로 삶의 방향에 좌표가 되는 화두(話 頭)를 제시할 수 있는 소재를 창작하는 게 바람입니다. 예술이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건 삶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붓끝에서 생동하는 움직임이 장엄한 그림으로 완성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에너지로 분출(噴出)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며, 모두가 도전하고 비전을 세워서 기도를 하면 다 들어 주시리라. 진실한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죽음의 벼랑 끝에서 생환(生還)한 최해덕 작가는 그의 삶속에서 예수가 빠지면 제로요, 의미가 없다고 고백한다. 그가 걸어 온 삶의 길목마다 예수가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고,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 그가 있다고 단언한다. 오늘도 최 작가는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창대한 그림을 구상하며 밤잠을 설친다고 한다. 그의 앞날에 늘 건강과 무한한 창의가 샘솟기를 두손 모아 기원하며 에필로그에 갈음하고자 한다.

 

 

최해덕 작가 프로필

1968년 청룡부대 기념관 및 주월한국군 사령부 기념관 건립

1969년 한국 최초, 창작유화 미국 수출

1983년 IRDC 설립(고품질 유화 제작)

1989년 聖畫 창작개인전(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1990년 횃불 선교회 聖畫 개인전 전국 여전도회관 聖畫 개인전

1991년 유화 ‘제목 : 평화통일과 세계평화’ 문화부등록 제910196호

1993년 전 미국 대통령 Bill Clinton 취임 기념 초상화(미 백악관 소장)

2001년 지구본, 세계지도, 회전하는 별자리

- 전자 및 조각기술이 혁신적으로 결합된 3차원 입체 조형물 개발

- 무변색 천연의 광물질 물감활용, 광섬유와 LED 기술정보 표시 장착 (충격에 강한 반영구적 경량의 FRB 베이스)

2016년 유화 ‘제목 : 나라사랑’ 제작권 등록 제C-2016-018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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